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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살이/일상생활

해외에 살다보면 놓치는 것들

by 반짝이는강 2018.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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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에 온지 이제 6년째다. 2012년 12월 31일에 멜버른에 도착해서 도클랜드의 21층이던가 23층이었던 배우자의 친구 집에서 아주 멋진 새해맞이 불꽃 놀이를 보고, 일주일을 보내고, 2013년 1월 초에 시드니 생활을 시작했다. 1월 6일 일요일에 시드니에 도착해서 놀쓰 라이드 (North Ryde)의 지금은 초고층 유닛이 들어선 자리에 있던 호텔 (아마 스탬포드 호텔이었던듯...)에 체크인을 하고, 1월 7일부터 호주에서 첫출근을 시작했었다. 회사 안에서 이동을 한 탓에, 경제적인 든든함이 있었고, car allowance 대신 회사차를 선택했었기에, 시드니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사용할 수 있는 자가용도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 별 연고도 없는 호주에서, 특히나 연고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드니에서 아주 순조롭게 호주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이런 호주 생활이 벌써 6년째을 채워가고 있다 - 그 사이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가 호주에 온 지 몇달 지나지 않아서 2013년 봄에 대학교 시절 절친이었던 C가 결혼을 했고 여름 무렵에는 첫직장에서의 절친인 J가, 2014년 1월에는 대학시절의 절친 J가 결혼을 했다. 혼기를 꽉 채워 결혼한 절친들이라 더더구나 참석해 축하해 주고싶었지만, 마음만큼 쉽지가 않았다. 워낙 한국의 결혼식은 초고속으로 진행되니, 직접 참석한다해도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건 알지만, 여자들에게 결혼은 특별한 것인 만큼 친구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다. 그 후 C은 두 명의 아이를, J도 귀여운 아들을 출산했을 때도 - 축하카드를 보내고 축하전화를 할 수는 있었지만, 직접 찾아가서 함께 기쁨을 나눌수는 없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세계가 통하고 있지만, 특히나 PC 통신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온라인 세계에 익숙한 나였지만, 시간이 쌓여갈수록 친구들과 나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기는 점점 어려워져만 가는 것 같다. 어쩌면 내가 한국에 살고 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삶이나 환경이 바뀌면, 특히나 결혼을 한 사람 vs 안한 사람 그리고 아이가 있는 사람 vs 없는 사람,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 vs 안하는 사람, 남자 vs 여자, 그 외 어떤 직장에서 어떤 직급에 있는지에 따라서 까지... 학생 때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공통된 대화거리가 줄고, 그러다보면 연락이 뜸해지고,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이리라. 


이런 일은 비단 친구 관계뿐 아니라 가정내 대소사에도 해당이 된다. 그나마 혈육의 결혼식에는 다행이도 참석을 하였고, 전후로 꽤 오랜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지만 - 나이가 조금 더 드니 결혼식은 정말 일부일뿐이라는걸 깨닫게 된다. 요즘은 부고가 자주 들려온다. 

2016년 말이던가 - 그간 가족에게까지 혈액암 투병 사실을 쉬쉬해오시던 큰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뒤늦은 베트남전 참전의 휴유증으로 백혈병을 앓으셨던 것 같다. 여러모로 존경할 점이 많은 분이셨고, 항상 건강하던 분이시라 암에 걸렸다는게 의외였다. 2016년 봄에 여동생의 결혼식에서 뵈었을때,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 기억난다.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탈모 증세가 있어 가발을 쓰고 계시다는걸 알 수 있었다.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체온을 예의주시하고 열이 나면 재빨리 응급실에 가야한다. 큰아버지께서도 이런 주의사항을 전달받으셨을텐데, 열이 남에도 냉수욕을 하며 하룻밤을 보낸 후에야 응급실로 가셨던 것 같다. 병원에서 일주일도 채 넘기지 못하고 운명하셨다고 한다. 아마 패혈증이었으리라. 

2017년에는 설날 오후 - 아버지께서 운명하셨다. 일본의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고 자란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모두 배우자를 일찍 잃고 재혼을 한 경우였기에 큰아버지와 아버지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복형제였다. 아버지는 매우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한 것이라 가족 누구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말년에 아버지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이던 시절 - 어린 마음에 나는 부모님 곁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꼭 그때의 그런 마음 때문은 아니지만, 지금 이렇게 한국에서 멀리 뚝 떨어진 호주에 살고 있다. 돌이켜 보면 아버지는 그냥그런 남편이거나 혹은 별로인 남편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자식인 나에게 꼭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버지를 원망 혹은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조금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어서, 나는 아직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해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아마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2017년 봄, 남동생의 결혼식에는 직전 해의 여동생 결혼식에 참석하셨던 아버지도, 큰아버지도 부재했다. 여동생 결혼식에서 결혼식 시작전부터 폐백이 끝날때까지 펑펑 울어댓던 터라 남동생 결혼식에서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있었는데, 동생과 올케가 준비한, 불과 몇 달 전 고인이 된 아버지 사진들을 보고는 또 다시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결혼식에 참석한 친척분들 모두가 눈물을 훔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2018년 8월 - 몇 일 전에는 어릴 때부터 자주 뵈오던 큰 고모의 부고를 전해들었다. 지난 해던가 흑색종으로 알려진 피부암으로 진단받았고, 수술 및 방사선 치료를 받았는데, 재발한 케이스였다. 아마 인터페론을 투여받으셨던거 같은데, 거의 효과가 없었고, 암이 여러 곳으로 전이가 되었고, 통증으로 고생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3남 4녀 중 막내아들에 순서대로 따지면 여섯번째 자녀였다. 일곱 명 중에 벌써 세분이 돌아셨다는게 어쩐지 아직도 잘 믿기지가 않는다. 왕래가 많았던 작은 큰아버지와 막내고모는 삼년째 연달아 혈육을 잃어 꽤나 상심이 클 것이다. 어렸을 때는 늘 당연하게 친척분들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아왔는데, 이렇게 부고를 전해듣고도 막상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게, 그 자리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게 안타깝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기쁘고 슬프고 어려운 일들을 함께 겪으며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이런 시기를 호주에서 보내고 있다는건, 그래서 소중한 사람들과 삶의 희노애락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은, 해외에 살면 어쩔 수 없이 놓히게 되는 순간이다. 아주 가끔 - 아이가 어린 경우 부모님과 아이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의해 전가족이 한국에 몇 달 혹은 1년간 돌아가서 살다가 다시 호주로 오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이 왜 그리 비싼 기회비용을 들여서 한국에 다녀오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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