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도 중국도 설 연휴에 접어들었다. 설에 한국에 다녀온게 2년 전이었던거 같은데... 그때 오랫만에 고교친구들을 함께 만났었다. 여자라고는 나랑 H 둘뿐이고 남여공학 이과반 답게 다들 남자들. 그들은 서로서로 잘 아는지 몰라도, 나는 그들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그래도... 오래된 익숙함에 만나면 마음 편한 친구들.
육두문자에 심각한 반감이 있는데 - 고등학교 동창 남자애들이 쓰는 육두문자는 어쩐지 익숙한 정감이 있다. 물론 - 그들도 남여공학 다녀서 보통 남자고등학교 나온 사람들보다 부드러운 & 완곡한 표현을 쓰는걸꺼다.
아무튼 오래된 친구들이 보고싶은 날이다. 고교 수학 여행때 찍은 사진 하나 찾아보려고 해도 - 당최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구만.
고교를 남여공학 이과반을 다녔더니... 당시에 친했던건 죄다 남자애들인데 - 요즘 나이가 되니까, 그네들 마눌님들의 눈초리가 매서워서 연락하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다. 조심스러운게 아니라 몇 년의 누적된 학습효과가 있어서 그냥 연락 안하고 못한다.
제기랄. 한국은 왜 이렇게 남중 남고 여중 여고로 나눠놨나 모르겠다.
거의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 오늘은 아빠의 네 번째 기일이었다.
2017년 설날 - 아빠는 여동생이 결혼하고 처음 맞는 설날 돌아가셨다. 언젠가는 아빠가 돌아가실꺼라고 -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런 일은 언제 닥쳐도 갑작스러운 일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첫 해에는 산다는 것이 매우 허무하게 느껴졌고, 아빠 생각도 자주 났었고, 꽤 우울했었다.
두번째 해에는 그 빈도는 덜 했지만, 여전히 아빠의 부재라는 그림자가 있었고, 삶에서 중요한 것이 조금 달라졌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브리즈번으로 이사오게 되었지 싶다.
아빠의 부재에 대해 무덤덤해질 무렵에 배우자의 부모님이 -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두 분은 약 10일 차이로 거의 동시에 돌아가셨다. 두 분의 죽음은 생각보다 꽤 많은 슬픔을 가져왔다. 동시에 내 평생 아빠와의 추억보다 내 평생 6번 만난 두 분과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더 많다는게 - 슬프고 씁쓸하고... 복잡했었다.
아빠는 - 정말로 아주 말이 없었고, 가족이랑 행복한 하루를 보내려는 생각은 아마 해본적도 없었던 것 같다. 아빠랑 단답형 질문 말고 대화다운 대화를 해 본 기억이 정말로 하나도 없다.
예전엔 그게 못마땅했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아빠는 할아버지가 아주 일찍 돌아가신 관계로 아빠없이 자라서... 아빠라는 존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가족이 무엇인지 몰랐었던 것 같다. 더욱이 사랑받고 사랑을 주는 것에 대해 경험을 해보지 못해서, 마음은 있었는지 몰라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던 것 같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금... 아빠의 마음이 어땠었나는 여전히 미스테리다.
아빠가 준 교훈은 - 동생이 보면 짜증내겠지만 - 가까운 사람한테 잘 하자.
남동생이 - 제사를 시작하면서 Facetime을 해왔다. 엄마랑, 여동생이랑 제부랑, 귀여운 조카도 함께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어서 참 다행이고 든든하다. 다들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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