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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살이/일상생활

늙어가는 부모님을 지켜보는 것

by 반짝이는강 2019.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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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급격히 쇠약해졌을 때 - 난 아빠랑 거의 연락을 않고 지냈었다. 호주에 살고 있었던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아빠가 돌아가시기 직전 1-2년 파국으로 치닫는 내 결혼생활에, 불행하다고 생각되어 누구도, 특히 아빠랑은 통화하는 것을 피했었기에 더 그랬다. 지금이야 내 결혼 생활이 파국으로 치닫던 때도 있었고, 좋았던 때도 있었고, 무덤덤한 때도 있다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지만 말이다. 

정작 아빠에게는 쌀쌀맞았으면서 배우자의 부모님에게는 - 우리 관계가 등락을 거듭해왔음에도 불구하고 - 나는 살가운 며느리이 노릇 (내 생각에만)을 하고 있으니 동생은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내가 배우자 부모님에게나마 살가운 며느리일 수 있는 건 - 아마 배우자 어머니가 나에게 지극하기 때문도 있고, 영국에서는 전반적으로 며느리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매우 낮기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만 배우자랑 관계가 별로일 때는 나도 사람인지라 배우자 부모님에게 - 서신왕래를 아주 뜸하게 하던 때도 있기는 했다. 

갑작스런 아빠의 죽음으로 인해 시간의 유한함, 가족의 소중함, 부재에서 오는 슬픔 같은 것을 접하게 되었고, 동시에 집안의 대소사들이 몰려 지나갔기 때문일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 알게 모르게 삶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 많은게 바뀌었다. 살아계신 엄마나 배우자 부모님과는 아직 기회가 있기에 그래서 조금은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건 아이러니하게도 아빠가 돌아가셨기 때문일꺼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해도, 아마 나는 아빠랑은 그리 썩 잘 지내지는 못할꺼다. 

최근 Pharmatimes 라는 대회에 참여한건 - 공짜로 영국에 가서 시부모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시부모님 댁에 공짜로 방문해 보겠다고 - 경연대회에 참여하는 며느리라니... 남들이 들으면 기가 찬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던 나는 3차 final에 초대받았고, 지난 주에 영국으로 가서 3차 대회에 참여한 후 영국 남부 햄프셔 (Hampshire)의 뉴밀튼(New Milton)에 있는 시댁으로 향했다. 2017년에 이 대회에 참여할 때 뵙고 처음이니, 2년만이다. 날라리 아들을 둔 시부모님은 내 결혼 1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딱 3번 봤다. 결혼하기 전까지 합하면 딱 4번 만난셈이다. 

내가 가기 바로 몇 일 전 - 고령의 시아버지가 집 차고에서 차 시동을 걸었다가 차고 기둥을 완전히 손상시키는 일이 있었다. 다행이 다친 곳은 없었지만, 차가 아주 많이 손상되었고, 차고 기둥도 넘어져버렸다. 그래서 영국에 사는 배우자의 동생이 차고 및 차량 수리, 보험회사와의 연락 등등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부랴부랴 시댁으로 왔다. 이로서 배우자의 동생과는 두 번째 만날 수 있었다.  

<동네를 돌며 아이스크림을 파는 차>

이동식 아이스크림 차

​배우자의 아버지인 Wally는 왕년에 유럽 및 중동 곳곳을 다니며 등대에 들어가는 대형 전구를 팔던 잘생기고 유머러스한 세일즈 맨이었다. Laura는 아이가 많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집 출신인데, 세계 2차 대전 때 집을 떠나 시골로 보내졌고 거기서 몇 년을 보내는 동안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똑똑했다고 한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둘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원래는 서로 모르던 사이였다. 그러던 중 Laura가 먼저 연상의 Wally를 발견했고, 어느 비오는 날 자동차로 퇴근을 하는 Wally에게 Laura가 다가가서 비도 오고, 같은 방향이니 집까지 태워다 달라고 하면서 둘의 로맨스는 시작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결혼을 하고, 전쟁의 여파로 경제적으로 쑥대밭이 된 영국을 떠나 캐나다로 가기로 한다. 캐나다에서 둘의 생활은 매우 순탄했다. 둘은 쉽게 집과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특히, Laura는 캐나다에 집을 구하자마자 3일 만에 동네에 있는 은행에 취직을 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사장 비서로 발탁되었다. 

<젋은 날 캐나다에서의 시부모님>

오래전 기억

캐나다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둘은, 5년이 지난 시점이던가, 첫째인 내 배우자를 잉태하게 되면서, 영국으로 배를 타고 돌아온다. 캐나다에서 새로 구입한 차와 냉장고며, 가전, 가구들을 잔뜩 배에 실어서 말이다. ​

내 생각엔 시부모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캐나다에서 보낸 그 몇 년이 아닌가 싶다. 물론 영국에서의 삶도- Wally는 잘 나가는 세일즈 맨이었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었고, Laura는 전업주부에, 명석하고 건강한 아들 둘을 뒀으니 타인의 눈으로 보자면 매우 순탄했으리라. 

<Wally가 사온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Laura>

아이스크림을 든 로라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Laura는, 노년에는 아마추어 화가였기도 했는데 - 그래서 시어머니로 부터 선물을 받거나, 카드를 받을 때마다 항상 그녀의 눈썰미에 감탄하고는 했었다. 그런 그녀의 감각이나 가끔 완벽주의자 기질을 배우자가 물려받은 것 같다. 

이런 Laura를 부인으로 둔 Wally는 설겆이랑 가드닝 말고는 요리를 포함해 집안일이란걸 해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Laura가 먼저 산소호흡기를 달고 누워지내게 되었다. Wally는 이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생각해본적이 없었으리라. 

청소는 그나마 일주일에 한번씩 청소 해주는 사람이 온다고 하지만, 요리는 참 대체가 어려운 것 같다. 이번에 Wally가 관리 해 온 냉장고를 열어보니 유통기한 지난 식품들이 가득하다. 2019년 3월 말인데, 2018년에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들도 있고, 곰팡이가 핀 토마토며 치즈도 냉장고에 들어앉아 있었다. 

시부모님은 일주일에 세 번씩 환자를 위한 음식 배달 서비스를 제공받고 있었는데 - 매번 음식이 별로라고 말씀하시고는 했었다. 이번에 직접 가서 배달되어 온 식사를 보니 - 시각적인 면에서나 후각적인 면에서나 전혀 매력이 없는 음식이었고, 오히려 식욕이 뚝 떨어졌다. 맛도 형편 없었다. 시어머니는 소스를 숟가락으로 한번 찍어먹어 보더니 안먹겠다고 하셨다. 이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나는 아빠 생각이 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아침 저녁으로 30분씩 Laura를 돌봐주러 가정 방문 케어러가 와서 약물 복용이나, 간단한 집안일, 목욕 등을 도와주지만 그걸로는 한 없이 부족했다. 90이 넘은 Wally는 자기 한 몸 가누는 것도 힘든데, 하루에 수십번씩 이층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Laura를 돌보느라 많이 지쳐있었다. 아침식사로 포리지를 들고 이층으로 향하다 계단에서 구른적이 내가 아는 것만도 벌써 꽤 몇 번되었다. 그 와중에도 Wally는 자기가 죽으면 Laura를 돌봐줄 사람이 없을까봐, Laura가 사는 동안까지는 자기가 살아 있어야겠다고 굳게 다짐한듯 했다. 

Laura는 Laura 대로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Wally가 예전과 비교해서 자기에게 신경을 써주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는다며 화가 나 있었다. 배우자 동생 말에 따르면 움직이거나 말 할 수 없기에 삶의 질이 아주 바닥인 Laura는 자살 기도를 벌써 몇 번이나 했다고 한다. 

2년 사이 이렇게 많이 변한 시부모님의 상황과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한쪽 벽에 있는 Tom의 키 성장 기록> 

벽에 키 성장 기록

시부모님이 이렇게 늙어가는 동안 ​하나밖에 없는 손자 Tom의 키는 계속계속 자랐다. 2011년부터 차곡차곡 기록된 Tom의 키를 보니 - 이제는 나보다 훨씬 크다. 

한쪽에서는 쑥쑥 자라는 동안, 한쪽은 한없이 쇄약해지고 있다. 이게 삶의 순환인가... 부정하고 싶지만 나도 이제 성장의 시기가 끝이 났고 쇠락의 길로 들어서고 있겠지. 문득 이 모든게 슬프다. 

<마당에 온 봄>

영국 시댁 정원

정기적으로 숙련된 정원사가 와서 관리해주는 정원은 집주인의 악화일로와는 상관없이 싱싱한 초록을 띄고, 봄을 알리는 노란 수선화가 가득 피었다. 

고작 이틀 동안 두 분 곁에서 지냈는데 - 시어머니는 날 더러 호주로 돌아가지 말고 자기네와 같이 살면 안되느냐고 하셨다. 나의 갑작스런 방문이 괜히 두분의 마음만 싱숭생숭하게 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된다. 5월에 다시 가서 두 분이랑 몇 일 더 시간을 보내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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